권세(막2:1-12)
하나님은 조물주이십니다. 누군가 강력하게 주장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주가 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다 부정해도 여전히 창조주이신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내가 믿어주니까 하나님도 대우 받는 줄 아시기 바랍니다. 이런 생각이 은근히 우리 속에 일어날 때가 있지요,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주를 위하여 있는 것이지,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롬 1:25 보면,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인간은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에 다른 피조물과는 차이 나게 창조하셨습니다. 생명나무와 선악을 아는 나무 사이에 있는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무관하고, 생명나무와만 관련이 있는 존재로 사는 것이 참 인간의 본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처음엔 하나를 더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원치 않는 죽음에 매여 사는 존재가 돼버렸습니다. 죽음의 모습은 선과 악 사이에 끼여 있는 자의 괴로움으로 우리 가운데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원래의 모습은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사이에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사는 존재였지만, 이젠 생명나무는 철수하고, 생명과 무관한 것들만 붙들고 사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지금도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들이 알고 있는 현재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본모습을 회복하기를 요청하고 계십니다. 아들을 죽음에 내주시면서 우리가 그동안 잊고 살았던 본래의 모습을 찾도록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자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도록 역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잃는 것이 삶의 법칙인 것 같습니다. 어떤 꼬마가 소나기로 삼행시를 지었습니다. 소: 소방차가 열심히 불을 끄고 있다. 나: 나는 신나게 불구경을 했다. 기: 기절했다. 알고 보니 우리 집이었다. 신나게 불구경은 했지만, 자기 집이라는 사실에 기절했습니다. 우리도 마치 인생을 살면서 뭔가 신나게 구경하고 즐기기는 것 같은데, 정작 중요한 것 꼭 나에게 있어야 할 것은 빼앗기고, 잃어가면서 그것을 얻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천국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이렇게 소개합니다. 혹 천국을 팔아 껍데기만 수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세상에 천국이 밀려오면서부터 그 경계면에 난해하고 복잡한 갖가지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서로 이질적인 것이 만나면 반기는 사람들도 있고, 단호하게 거부의사를 밝히는 사람들도 생기는 것처럼, 복음도 이런 양상으로 전달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공적인 권위를 가지고 찾아오셨습니다. 사람들은 천국을 모릅니다. 겨우 아는 것은 유토피아적인 천국뿐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천국을 제대로 알고 계십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은 인간 편에서는 진짜 천국과 접촉점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자에게서만 나오는 것이 회개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역사적 시간에 의해서 살아갑니다. 시간의 순서를 과거, 현재, 미래를 구분하면서 살아갑니다. 역사를 이야기할 때, 고대, 중세, 근세, 현대 이렇게 구분하는 것도 바라보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중세 사람에게 그 중세는 현대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시간은 피조물의 움직임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천국은 이런 시간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운영체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그런 영역이 곧 천국입니다. 인간은 생명나무를 상실하는 순간 이런 개념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히 그런 세계관을 우리에게 넣어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천국의 묵시적 시간관이 역사적 시간관으로 움직이는 지상에서 활동할 때에는 ‘권세’라는 것을 가지고 활동합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지금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단순히 고치는 것이 최종목적이 아니라, 중풍병자의 고침을 통해서 예수님의 권세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시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권세란 이 세상 가운데 지금 천국이 활동을 개시했다는 증거물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 권세를 쥐고 계신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통하여 죄 사함의 권세를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곧 권세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법칙에는 두 남녀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으면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이름 안에는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인간 편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덮쳐오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시간의 영역에서 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세계가 덮쳐올 때에만 가능한 현상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기존의 인간의 가능성에 입각해서 예수님을 평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중풍병자는 자신의 불가능성을 지니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중풍병자는 자기 힘으로 예수님 앞으로 나올 수 없었던 자였습니다. 그래서 동무들이 침상을 들고 나왔고, 지붕을 뜯어 예수님 앞에 도착한 사람이 바로 중풍병자였습니다. 따라서 이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이나, 일어나 침상을 들고 걸어가는 것은 어떤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의 일방적인 역사뿐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도,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구걸 장소에 오는 것조차 본인의 힘으로 못하는 자였습니다. 누군가가 그 장소에 이동시켜 주어야만 구걸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 라고 외쳤습니다. 그랬더니 앉은뱅이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평소 하루 종일 앉아서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다가 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잠잘 곳으로 이동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날도 그곳으로 나오면서 오늘의 일과가 끝나면 여전히 앉은뱅이의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가겠지? 여기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이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왜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있는 권세가 이 앉은뱅이에게 도착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내가 누구인가’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고 있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권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권세는 우리의 정성과 노력을 보시고 기특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편에서 예수님의 권리로 예수님 뜻대로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죄 사함도 예수님의 권세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믿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권세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권세를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권세를 알고 믿는다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 있는 그 자체를 가지고 기독교는 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젠 권세를 가지고 역사의 공간에서 활동하시던 주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천국의 권세가 이제는 중단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책이 바로 사도행전이고, 사도들의 움직임에서 하나님은 천국의 권세를 그대로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를 고쳐주고 난 후, 사람들이 자신들을 주목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그렇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 따로 계신데 그분이 지금 우리를 사용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 사도들에게만 그 권세가 주어진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증인으로 살려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셨고, 계 11장 3절에 보면,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말씀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증인은 반드시 권세를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 증인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권세를 주셔서 죄의 권세에 매여 있는 자들을 자유케 하는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가운데 권세가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권세는 어떤 조건이라도 능히 극복합니다. 예수님의 권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죽음조차 예수님의 가시는 길을 막지 못합니다. 성도는 그 권세를 경험한 자입니다. 자기의 행함으로 성도된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생명나무와 무관한 것은 인간의 참모습이 아닙니다. 거져주시는 은혜를 누리며 사는 것이 성도입니다. 당신은 성도입니까? 권세는 천국이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말라 천국은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 안에 참된 권세가 있고, 예수가 여러분 안에 계시면 여러분은 권세의 사람 곧 성도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말들이 많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사람들인 성도들이 하는 일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말들이 많습니다. 예수 믿는데 왜 그것밖에 안 돼! 예수 믿는데 왜 자식이 그 모양이야! 참 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중풍병자는 누가 뭐래도 예수님의 권세를 만났기에 더 이상 군말이 필요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자기를 사로잡아버린 그 권세를 알기 때문에 그는 일평생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세를 만난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권세 앞에 중풍병자는 자신의 모든 경험을 내려놓았습니다. 내가 중풍병자라는 사실조차 포기합니다. 여러분 이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 쉬울까요? 주님의 죄 사하는 권세가 선포될 때에 비록 어제까지는 죄인으로 살았다 할지라도 과감히 죄인의 신분을 포기해 주셔야 합니다. 또한 지금까지 쌓아놓은 경험과 지식도 포기해 주셔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 권세를 만난 자의 모습입니다. 예수 안에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하시면, 정죄함이 없음에 당신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권세는 당신의 지식과 소유도 초월합니다. 권세를 만났던 삭개오는 평생 공들여 모은 재산에 대해서 자유했습니다. 그러나 한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소유를 포기하지 못하여 예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 만났는데 우리가 포기하지 못할 것이 세상에 무엇이 있습니까? 포기한다고 실패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권세가 소유를 초월하여 역사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권세에 사로잡힌 성도의 모습임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이 권세는 아무데나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권세의 사용처가 분명합니다. 마태복음 9장 13절에 보면,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권세는 의인이라고 하는 자에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권세는 오직 죄인이라는 위치를 분명하게 깨닫는 자에게만 나타납니다. 여러분은 이 권세를 맛보셨습니까? 그렇다면 틀림없이 용서받은 자입니다. 용서받은 자보다 더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 안에 참된 자유를 누리시는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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