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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읽는 설교

불뱀과 놋뱀(민21:4-9)

하늘과 무지개 2024. 6. 11. 13:16

하나님을 인간의 이해와 상식의 틀에 가두고 있습니다. 즉 자기의 틀 안에서 하나님을 상상하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 자기의 틀에 하나님을 가둔다고 해서 갇힐 하나님도 아니시지만, 결국 인간의 틀 안에서 상상한 하나님 그분을 찾아간다면 우리는 전혀 엉뚱한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해와 상식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자신의 이해와 상식에 맞지 않는 일이 있을 때 자연히 거부하게 되고 반감을 가지게 됩니다. 인간의 이해와 상식은 여러 가지를 기준으로 형성됩니다. 살아가는 문명, 환경이 기준이 될 수 있으며, 지식이 기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즉 문명, 환경, 지식의 범위를 벗어나면 이해하지 못하고, 만약 그 범위를 벗어난 일에 대해서 반감을 드러내면서 거부하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본성은 남녀노소나 빈부차이, 지식의 유무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이 동일합니다. 때문에 인간의 본성에서 벗어나면 모든 인간이 같은 반응을 보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을 벗어난 일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이해시킬 수 없습니다. 과학적인 문제는 과학으로 이해시키면 되고, 의학적인 문제는 의학으로, 철학적인 문제는 철학으로 이해시키면 되지만 본성의 문제만큼은 무엇으로도 이해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알아야 인간이 어떤 일에 대해서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납득하지도 못한 채 반감을 가지고 거부하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생명에 대한 보호입니다. 즉 자기를 지키고 보호하고 자신의 생명을 강하게 하고 확대시키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사람은 결국 이것을 뿌리로 해서 모든 행동에 나서게 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살아있는 이상 그 생명을 좀 더 확대시키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하며 살아갑니다. 다시 말해 살아있다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채 언제나 좀 더 잘 살아보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옷을 입어도 옷 그 자체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옷을 통해서 자신을 최대한 돋보이려고 애를 씁니다. 세상은 살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상식입니다.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이 상식과 본성과 반대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살기 위해서 살아가는 세상에 죽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분은 예수님이었습니다.

16:25"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좀 더 쉽게 하면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죽을 것이요 주를 위해서 죽고자 하는 사람은 살리라'는 의미와 같은 말입니다. 또 요 12:25절에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는 말씀도 같은 의미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살아갑니다. 또 자기 생명을 사랑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정한 이치고 상식입니다. 누가 이것을 깨뜨릴 수 있습니까? 이것을 깨뜨리는 사람은 어느 특정 인물로부터 공격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이해와 상식과 본성은 하나님의 생각과 다릅니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산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모든 행동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하게 됩니다. 교회를 나오는 것도 자기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상식적인 종교이고 하나님입니다. 나를 살려주는 하나님을 찾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교회에 나오면서 '나를 죽이시는 하나님' '나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나오시는 분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덕분에 힘든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또 홍해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기들만 살고 애굽 군대는 죽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일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우리를 좋은 길로 인도하시고 좀 더 편한 삶을 주기 위해서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대했던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 전혀 다른 길이었습니다. 고통과 고생이 기다리는 길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에서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터져 나오게 된 것입니다.

본문 4,5절을 보겠습니다. "백성이 호르 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을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이스라엘은 지금의 하나님이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자기들의 생각에는 하나님은 살려주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살려주기는커녕 오히려 식물도 없고 물도 없는 곳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살려주는 하나님이 왜 우리를 죽게 하느냐고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본문을 통해서 참된 기독교, 참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인간의 본성으로 이해하고 인간의 본성에 맞는 상식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자기 생명에 대한 인간의 탐욕과 집착력을 옹호하고 부추기는 것은 오히려 멸망으로 인도하는 거짓된 기독교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고생의 길로 인도하신 것은 그들의 감춰진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죄는 속성상 그 모습을 은밀하게 감추고 있습니다. 양의 탈을 쓴 이리와 같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죄가 드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인도하십니다. 때론 자존심이 상하는 문제를 통해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도록 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깨닫고 죄의 해결을 통해서 우리에게 참 안식을 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관심이 자기의 생명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살려주는 분이지 죽이는 분이라는 것을 전혀 생각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에게 불뱀을 보내서 그들을 더 큰 고통과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불뱀이란 붉은 점이 있는 뱀으로 한번 물리면 불에 데인 것처럼 심한 통증을 느끼다가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 불뱀을 보내서 그들을 물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까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까? 왜 이스라엘 백성에게 불뱀을 보내셨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까? 있는 불뱀도 없애줘야 당연한데 오히려 불뱀을 보내서 고통스럽게 하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것을 여러분 자신의 문제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고통의 의미를 생각하기보다는 고통 자체를 아예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고통은 내 생명을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분명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산다는 의미는 육신의 생명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쉼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즉 주안에서의 안식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생명입니다. 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필연코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가 죄입니다. 죄 때문에 자신에 대해서 한탄하고 절망해 봐야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고 그것이 곧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원망할 때 불뱀을 보내신 것은 죽음 속에서만 참된 생명이 싹트기 때문입니다. 옛사람을 죽이시고 새사람으로 살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살리시는 방법은 어떤 것입니까?

8,9"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살리는 방법은 놋뱀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이스라엘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불뱀을 물러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그것이 자기들이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7절에 보면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 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해서 기도하매"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무엇을 생각했습니까? 그들은 불뱀을 자기들의 원망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단순히 징계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면 하나님은 불뱀을 없애 줄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혹 여러분도 그러한 기도를 해보신 적이 없습니까? 사람들은 어떤 어려움이 발생하면 당장 자신의 죄를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어려움을 징계로 여기고 자신의 죄를 돌아본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사실 죄를 찾으려고 하는 이유가 속히 죄를 찾아내서 회개함으로 지금의 어려움이 사라지도록 하겠다는 의도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편해지기 위한 용도의 회개인 것입니다.

회개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바라보던 시선이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 후로는 자신의 생명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위해서 회개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진정한 회개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스라엘이 꼭 그와 같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불뱀이 자신들의 원망의 결과임을 알았지만 여전히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뱀을 그대로 두고 이스라엘을 살리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것이 장대 위에 놋뱀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뱀은 여전히 그대로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결국 하나님은 좋은 환경을 만들어서 우리를 살리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상식에 맞는 기독교는 아예 처음부터 고통의 길로 인도하시지 않는 하나님이지만, 혹 뭔가 잘못이 있어 고통으로 인도하셨다고 해도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면 금방 좋은 환경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은혜도 불뱀이 있는 상황에서 불뱀이 사라지는 것이지 불뱀이 여전히 있는 은혜는 도저히 상상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본문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은혜는 불뱀이 여전히 있는 가운데 놋뱀을 세우는 것입니다. 놋뱀을 바라보는 자만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방법입니다.

9절에 보면 놋뱀을 바라본 자는 누구입니까? 뱀에게 물린 자입니다. 뱀에게 물리지 않았으면 놋뱀을 바라볼 이유가 없습니다. 자신은 살아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자신을 살려주는 놋뱀을 바라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으면 산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죽은 존재라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살았다 하나 죽었다는 것의 참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결국 자신은 죽은 자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생명에 대한 갈급함이 사라지게 됩니다. 생명은 죽은 자만 원합니다. 살아있는 자에게 생명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때문에 아무리 신자라고 해도 자신이 죽은 자임을 알지 못한다면 생명을 바라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여 놓고 살리시는 방법을 취하시는 것입니다. 불뱀은 그대로 둔 채 고통과 죽음이 여전히 있는 가운데 단지 놋뱀을 바라보면 산다고 하신 하나님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이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과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의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놋뱀을 바라보라는 하나님이 이해되고, 놋뱀을 바라보는 사람 된 것이 곧 구원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쉼을 얻는 것입니다.

'놋뱀을 바라보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운 일입니까?'라고 하겠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아무 어려움 없이 편안하게 살고 있을 때 놋뱀을 만들어 심심풀이로 바라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불뱀으로 죽어가는 가운데 놋뱀을 바라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런 저런 어려운 일로 마음이 심란하고 염려가 가득할 때 그것에는 신경 쓰지 말고 예수님만 바라보라고 한다면 ''하고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놋뱀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3:14,15절을 보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놋뱀을 바라볼 때 살았던 것처럼 이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삽니다. 하나님은 구원받기 위해서 무엇을 하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할뿐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만 바라보십니까? 자신을 살아있는 자로 바라보십니까? 죽은 자라면 오직 주님께 구할 것은 생명입니다. 죽은 자에게 보석이 무슨 소용이며, 돈이 무슨 소용입니까? 죽은 자에게는 오직 생명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은 주님께 생명이 아닌 엉뚱한 것을 구할 것입니다. 자신을 더욱 가치 있게 해줄 세상의 것을 구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분을 죽이십니다. 세상에서의 생명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쉼을 얻는 영원한 생명에 모든 관심을 두게 하십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 일을 이해하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물러가라 불뱀이 아니라, 바라보라 놋뱀인 것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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